1966년 9월 22일,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의사당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오물(분뇨)을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정렴 재무부장관, 민복기 법무부장관의 국무위원들에게 투척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1966년 9월 15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동년 5월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해 들여온 사실이 경향신문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정재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뒤집혔다. 이에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려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의 상정 및 통과가 진행되었고 관계인들이 모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다.
이때 야당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힘을 합쳐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에 대해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이미 정부와 결탁했기 때문에 정부는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여야는 계속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국회는 들끓어오르고 있었다.
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에 국회 질의 마지막 날인 9월 22일, 결국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일을 저질렀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던 상태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완전히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다. 즉, 울분이 쌓일 만큼 쌓여 있던 상태였다.
실제로 김두한은 발언 중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영하 20도의 날씨에 콩밥을 먹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게다가,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원래 성격 자체가... 그는 이미 1954년에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과도 있었다.
사실, 김두한의 태도는 발언 전부터 매우 험악했다고 전해진다. 이효상 국회의장을 대신해서 사회를 봤던 이상철 국회 부의장이 김두한의 발언 순서를 불리하게 조정하자, 김두한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거 보려고 그래요?" 라면서 협박하였고,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같이 유도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실제로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과가 있었기에, 김두한의 이런 발언들은 매우 심상치 않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본회의에서 이만섭, 김대중의 질의가 끝나자 김두한의 질의가 시작되었는데, 일단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 3년 동안에 2년을 낙제하고 1년 밖에 못다녀 기초상식이 부족하여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나 김두한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고, 당시 국회 본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김두한은 실제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깡패 출신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굉장한 달변가로 유명할 정도로 말솜씨가 매우 좋았던 편이었다.
김두한은 이 사건의 부정, 불의에 대해 열변, 콩밥 이야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별장 같은 감옥에 이미 40여 회 들락날락했는데 또 다시 들어갈 심정'이라는 이야기, 그의 과거 반공투쟁에 대한 자화자찬,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이야기, 존 하지 때문에 오키나와 형무소로 갔다는 이야기, 그의 정치적 신념,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해외 각국의 사례, 서독의 풍족한 달러 보유, 북한 공산당들보다 남한에 이상적인 복지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는 주장, 통일 이후 무산대중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허리띠를 졸라 매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된다는 이야기,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 집단에 대한 규탄, 이승만과 싸운 이야기, 박정희 정권이 과거 이승만 정권과 뭐가 다르냐는 항변 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참다 못한 이상철 부의장이 시간이 대체 얼마나 걸리냐며 눈치를 주었지만, 김두한은 "좀 더... 15분..."이라고 발언한다. 이상철은 다른 의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김두한이 계속 발언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때까지만 해도 막무가내인 김두한의 행동을 보면서 다른 국회의원들은 상당히 재밌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어쨌든 부의장이 허락해 연설은 계속 되게 되었는데...
(장문의 연설 생략)...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 번 따지고 싶지만 국무총리가 여기 대통령을 대리하고 여기 장관이 나와 있으니까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3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간부터 다루겠습니다. (장내 웃음소리)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훗날 스포츠 서울과 MBC 히스토리 후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똥물은 김두한이 당시 수행비서였던 채원기를 시켜 탑골공원 변소에서 퍼왔다고 한다. 같은 수행비서였던 모세원은 다른 비서인 이세원이 탑골공원에서 퍼온 것이라 증언했다. 김두한 본인이 말하기를, 사건 직후 순국 선열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일부러 탑골공원 변소의 똥을 퍼왔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한편으로는 1966년 첫 번째 공판 과정 중에는 비서 2명에게 지시해 자택 변소에서 퍼왔다고 증언했다.
속기록에는 간단히 '장내 소란'이라고만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국회는 순식간에 인분을 뒤집어 쓴 국무위원들의 비명에, 진동하는 냄새에,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한 의원들까지 한 순간에 차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다. 그 날 김두한의 정면에 앉아 있던 국무총리 정일권은 인분 세례에 직격으로 맞은 탓에 양복은 물론 시계까지 모두 구리고 묵은 똥냄새가 배여 결국 버렸다고 한다. 또, 국회 속기사들도 날벼락을 맞았다고 전해졌다.
이 사건으로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고, 다른 곳도 아니고 국회에서 똥물을 뿌렸으니 당연히 여당에서 구속동의안을 냈다. 구속 직전에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당연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두한의 발언 중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번 따지고 싶지만'은 당시 사회 정서 상 매우 심각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적인 발언을 한 데다가 그 '호되게 따지는' 방식마저 충격적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여론이 몹시 안 좋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김두한에게 화살을 돌려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대부분의 여론은 "김두한이 깡패는 깡패지만 이번 일만큼은 정말 잘했다!"라는 반응이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여론이 정부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고 김두한을 칭찬하는 쪽으로 기울자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면서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아예 김두한을 직접 영입도 시켰다. 덕분에 아주 잠깐 자유당에 있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늘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을 떠돌아 다녔던 김두한은 정치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에서 당적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1년 정도 수감되었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몸을 망쳤으며 그가 급사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곧 얼마 안 되어서 고혈압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병보석으로 풀려난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선거 연설 도중 북한 찬양으로 반공법 위반, 선관위장 폭행 등으로 재수감되었으며 다시 병보석으로 석방되는 것을 반복했다. 어쨌든 그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병희 후보에 약간의 표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