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나치 전범이라는 악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땅에 묻히지도 못한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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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나치 전범이라는 악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땅에 묻히지도 못한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2023. 5. 10.

 

코코 샤넬,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로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다. 세계 패션 역사에, 특히 여성복과 실용성이라는 부분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자국 프랑스에서는 과대평가 논란이나 나치 스파이 등 여러 면에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흙수저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상업적 재능이나 디자인 쪽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동시대 샤넬에 비견되는 다른 패션 천재들도 많았으며, 실제로 많은 돈을 벌게 해준 원천은 자신이 디자인한 패션보다는 유대인이였던 자신의 동업자가 만들고 자신은 상표만 붙인 향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나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히틀러를 지지한다고도 밝혔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나선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나치를 이용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동업자를 사업에서 퇴출시키려 했을만큼, 전쟁 기간 동안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렇게 최고급 리츠 호텔에서 지내며 나치 정권에 부역하다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급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적이 있다.

이미 프랑스는 수많은 나치 정권의 협력자들을 만명 단위로 사형시켰던 만큼, 당연히 코코 샤넬도 부역 혐의로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과거 애인이였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인 윈스턴 처칠 수상의 도움으로 풀려나, 추방되다시피 스위스로 도피한 뒤 10년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 한다.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여성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다.


2014년에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France 3에서 방영한 TV 다큐멘터리《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방송됐다. 요원 번호는 F-7124, 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였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녀는 1940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을 한 이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스파이가 되었고, 1943년에는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

샤넬은 전쟁기간 동안 파리의 호텔 리츠에 머물렀다. 이곳은 나치 장군들과 요원들의 숙소와 가까웠다.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1년 여름에 가브리엘은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샤넬은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샤넬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나치 스파이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며 풀려났다. 그 이유 중에는 물론 그녀가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게 아니었던 점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처칠을 비롯한 영국 및 여러 유럽 상류층과 인맥이 있었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샤넬의 제품은 그때 당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샤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온 미국 병사들을 위해 NO.5(향수)를 푸는 등의 이미지 마케팅을 세웠다.

코코 샤넬이 나치에 협력한 이유 중 가장 근거있는 부분으로는 그녀의 파트너이자 코코 샤넬에게 향수로 큰 돈을 벌게 해준 사업파트너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권리를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샤넬의 향수 뿐 아니라 패션 사업의 첫 성공에 핵심적 기여를 하고 전후 복귀에도 엄청나게 투자해준 동업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는 판단력이 빠르며 물불을 안가리는 사업가였고, 코코 샤넬이 한번 배신을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싫어하는 샤넬을 계속 후원하며 15년 뒤의 복귀도 지원했다. 결국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샤넬은 프랑스에서 사실상 추방되었고,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 브랜드를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에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 가문에게 팔아버린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로서 현대 패션계에 큰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나치 스파이로서의 행적이 공식적으로 사실로 드러나면서, 코코 샤넬은 프랑스인들에게 수치로 남았다. 샤넬 브랜드 불매 운동도 일어났다.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