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이 사망한 뮌헨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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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이 사망한 뮌헨 참사


2023. 4. 26.

뮌헨 참사 또는 뮌헨 학살(Munich massacre)은 1972 뮌헨 올림픽 기간에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서독으로 침투한 후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 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건이다. 범인들은 모두 사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서독 경찰의 진압 실패로 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진의 위령비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그 건물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테러에 대한 자세한 정보, 희생자 개개인의 사연, 그리고 당시 사진을 보여주는 빔 프로젝터가 설치된 야외 추모관 또한 존재하며, 현재에도 조화가 놓여지고 있다.



서독은 1972 뮌헨 올림픽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에서 벗어나 밝고 진일보한 독일 사회를 보여주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선수단의 올림픽 참여는 차별과 폭력의 그림자를 단절하고 싶었던 서독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72 뮌헨 올림픽은 세계 평화를 올림픽의 주제로 내세우고자 의도적으로 행사의 보안을 최소화하였다. 뮌헨 올림픽 보안에 배정된 비용은 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 선수촌이나 경기장 어디에도 무장경찰이나 보안요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하늘색 복장을 한 '올리스'라는 이름의 진행요원들이 보안과 교통 통제를 담당하였으며, 올림픽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태도 역시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선수촌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너무 낮아 보안에 취약했다. 선수들은 담장을 쉽게 뛰어넘어 맥줏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이스라엘 선수단 역시 충분한 보안 대책을 갖추지 못했다.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보안담당자는 선수단에게 이목을 끌지 말고 수상한 가방을 열어보지 말라는 등 원칙적인 보안 지침만 안내하였다. 대표선수들, 코치와 심판들, 기자와 방송요원들은 선수촌의 열악한 보안을 우려하였으나 추가적인 조치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보안의 해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올림픽에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군정보부 제4국은 유럽에서의 테러가 입박했다는 첩보를 다수 입수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은 제시되지 않았고, 다수의 보고서는 국제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려오는 부정확한 경보로 치부되었다.



검은 9월단은 1971년, 검은 9월 사건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요르단에서 사담 후세인의 군대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 수천 명이 학살된 이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테러 단체는 철처한 신비주의 속에 운영되었다. 이들은 다른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는 달리 본부나 지부, 대변인 등을 갖추지 않았다.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 검은 9월단의 전체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비밀스러운 리더 아부-이야드뿐이었다. 이야드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대변인이자 파타의 수뇌부에 속해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검은 9월단과의 모든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이야드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3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되었다고 밝혔다. 첫째는 싫건 좋건 세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둘째는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200여 명 가량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석방시키는 것, 셋째는 투쟁을 보여주기 위해 집중된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검은 9월단의 하부 조직에 속한 8명의 청년 테러리스트들이 '이크리트와 비람'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을 위해 차출되었다. 이들 중 지휘를 맡은 이샤, 현장 전술을 담당하는 토니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두 달 전 차출되어 일급 기밀 임무에 투여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6명은 올림픽 개최 한 달 전이던 7월 중순부터 리비아의 사막 캠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테러범 중 한 명이었던 자말 알-지셰이는 6명 모두가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출신이었으며, 처음 훈련을 받는 날부터 언제든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테러 13일 전, 검은 9월단의 사야안인 남녀가 부부로 위장한 채 베이루트에서 독일의 쾰른-본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들은 무사히 4개의 큰 가방을 짊어진 채 세관을 통과해 뮌헨 중앙역에 있는 보관함에 화물을 집어넣었다. 가방 속에는 8자루의 AK-47과 가득 채워진 12개의 탄창, 그리고 10개의 슈류탄이 존재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올림픽 5일째였던 8월 31일까지 트리폴리에서 다양한 경로를 거쳐 모두 뮌헨에 도착했다. 테러 하루 전이던 9월 4일까지 이들은 평범한 관광객처럼 지역의 명소를 구경하고, 올림픽 경기를 시청했으며, 외식을 즐겼다. 4일 자정이 되서야 이들은 비로소 구체적인 작전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준비된 무기를 손에 넣고, 선수들로 위장하기 위한 붉은색 체육복을 입은 뒤 두 조로 나누어 택시에 탑승했다.
9월 5일 새벽 4시 10분, 두 그룹의 검은 9월단 침투조를 태운 택시가 선수촌 25A 게이트 옆 담벼락에 도착했다. 올림픽 공식 체육복을 입은 그들은 새벽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몰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월담을 시도하는 선수들처럼 보였다. 심지어 침투조 중 하나는 담을 넘던 중 술 취한 미국 선수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겹게 서로의 월담을 도와주었으며, 얼마간 걷다가 곧 헤어졌다. 선수촌을 가로지르던 테러리스트들을 독일 우체부들이 목격하고 본부에 신고하기까지 했으나, 서독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콘놀리가 31번지에 도착한 그들은 매고 있던 올림픽 공식 더플백에서 무기를 꺼내 일제히 AK-47을 장전했다.

이스라엘 남자 선수단에 배정된 아파트는 총 다섯 동이었다. 1동은 코치와 심판들이 묵었으며, 2동은 사격, 펜싱, 육상 선수들이, 3동은 역도와 레슬링 선수들이 쓰고 있었다. 4동에는 팀 닥터가, 5동에는 선수단장 랄킨이 있었다. 여자 선수들은 다른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조정 선수 2명은 경기가 열리는 독일 북부 킬에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문이 열려 있었던 1동의 로비를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북제된 열쇠를 가지고 있던 이들은 여러 열쇠를 돌려 가며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국제 레슬링 심판 요세프 구트프로인트가 잠에서 깨 숙소 안에서 문 옆으로 다가갔다. 출입문이 열리자 구트프로인트는 즉시 상황을 인지하고 거구의 덩치로 문을 막았다. 그는 동료들의 탈출을 위해 최대한 문을 밀어붙이고 버텼으나, 오직 역도 코치 투비아 스콜스키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홀로코스트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스콜스키는 직감적으로 뒷편의 이중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져 달아났다.

스콜스키가 무작정 도망쳐 향한 곳은 한국 선수단 숙소였다. 당시 한국 여자배구 코치 전호관은 새벽 5시 20분 경[14] 누군가 마구 숙소 문을 두들겼고, 처음에는 취객인 줄 알았고 항의했으나 곧 남자가 자신이 이스라엘 역도 코치라 설명했다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스콜스키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곤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숙소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전호관 코치는 즉시 경찰에 연락했으며, 10분 뒤 서독 경찰이 와서 스콜스키를 보호했다.# 스콜스키는 1동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구트프로인트를 제압한 테러리스트들은 1동에서 잡은 인질 6명을 2층으로 데려가 밧줄로 묶었다.[15] 1동 안에는 구트프로인트 말고도 5명이 잠들어 있었다. 비몽사몽이었던 다른 4명과 달리 친구들과 늦게까지 뮌헨을 즐기고 온 레슬링 코치 모셰 웨인버그는 테러 지휘자 이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총을 빼았으려는 순간 다른 테러리스트가 웨인버그에게 총을 쐈다. 총알은 그의 오른쪽 뺨을 관통했고, 테러리스트들은 제압된 인질들을 모두 2층 방에 몰아넣었다.

테러범 이샤와 토니는 두 조로 나뉘어 행동을 진행했다. 이샤와 2명은 1동의 인질들을 관리하고, 토니와 다른 4명은 웨인버그를 끌고 나와 이스라엘 선수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를 강요했다. 웨인버그는 2동을 지나쳐 3동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아마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역도 선수들과 레슬링 선수들이 테러범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듯하다.그러나 3동의 선수 5명은 총을 든 테러범들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역도 선수 데이비드 버거가 반격을 시도했으나 곧 개머리판으로 강하게 구타당했다. 토니 일행은 플라이급 레슬링 선수 가드 차바리를 선두에 세워 인질들을 1동으로 데려갔다. 1동 로비 앞에 도착한 순간 차바리를 테러리스트의 총을 후려치고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해 주차장으로 뛰어내려갔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차바리의 탈출과 함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웨인버그는 근처 테러리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러리스트는 반사적으로 총을 발포했고, 웨인버그의 죽음과 함께 길게 울려퍼진 총성은 선수촌 전체를 깨웠다. 이렇게 10명의 이스라엘 선수단 인질이 1동에 감금되었다.

오전 4시 50분경 사태를 인지한 올림픽 본부 측에서 내보낸 진행 요원이 1동 앞에 도착했다. 진행요원은 웨인버그의 시체와 로비를 지키고 있는 테러리스트를 발견했다. 그는 본부에 상황을 설명했으며, 같은 시간 이스라엘 선수단장 랄킨은 급히 이스라엘 기자들이 묵는 호텔로 전화를 걸어 인질극이 발생했다고 외쳤다.

한편 1동에서는 레슬링 선수 요세프 로마노가 웨인버그의 죽음을 보고도 테러리스트에게 달려들려고 시도했다. 그는 한 명을 바닥에 쓰러드렸으나 다른 테러리스트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 로마노의 시체는 거실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 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과, 같은 공산주의 단체 바더 마인호프의 두 리더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서독 경찰에서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올림픽 주최측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단 소식을 들은 후에도 경기를 지속했고,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은 뒤에야 모든 경기를 중단했다.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었던 게, 전범국이었던 과거로 인해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후 뮌헨 경찰서장인 만프레트 슈라이버 총경(1926~2015)이 현장 총책임자가 되었다. 슈라이버는 일반적인 경찰 업무에 있어서는 훌륭한 평을 듣는 경찰이었지만, 인질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슈라이버는 더욱이 사건 발생 1년 전인 1971년 8월 4일 일어났던 은행강도 인질극에서 불확실한 대처로 인질 1명이 사망하여 기소당한 전적도 있었다. 슈라이버가 현장을 지휘하면서 여러 문제가 터져나왔는데, 사건 발생 후 인질극이 벌어진 선수촌 주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기자와 구경꾼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방송국에서는 아예 카메라로 생중계를 해 버리는 바람에 테러범들은 경찰의 행동 하나하나를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해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출동한 이들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평범한 일선 경찰관들이었다. 당시 테러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내에서 사격을 잘하는 사람을 찾길래 지원을 했더니 이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운동선수로 위장한 경찰들이 스포츠 가방에 무기를 숨겨서 테러범들이 점거한 숙소 맞은편 건물의 옥상으로 잠입해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매우 두꺼운 방탄복 위에 체육복 상의를 걸쳐 방탄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복장으로 잠입을 시도했고, 현장의 언론 통제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테러 진압 작전 준비 모습을 방송국 카메라가 모두 담아버려 TV 뉴스로 이 광경을 본 테러범 중 한명이 테라스로 나와 위장 경찰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인질들을 모두 살해 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결과, 작전은 무산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상부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24시간 안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요구해서 인질들과 함께 비행기로 중동에 있는 나라로 가기로 명령받았기에 헬리콥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 당국은 테러범들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에 서독 경찰 당국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 안에는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놓고, 외부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테러범들을 사살하려고 했으나 비행기 내부의 경찰들이 겁을 먹고, 헬리콥터가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독단적으로 작전을 취소한 뒤 철수해 버렸다.

결정적으로 작전이 시행되기 30분 전까지도 독일 경찰 당국은 테러범의 숫자를 5명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8명이지만 올림픽 선수촌에서 인질의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간 IOC 위원이 "테러범 5명을 봤다."고 한 말을 검증도 없이 믿었고, 나중에 테러범들이 이동하는 헬리콥터에서 테러범이 8명이라는 소식을 전해오고 나서야 정확한 인원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미 작전에 들어간 경찰관들에게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착륙한 후 테러리스트들이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을 전부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 와중에 서독 경찰 1명이 전사했으며 테러범들이 탄 헬리콥터에 수류탄을 던져 넣어서 헬리콥터가 폭발하고 다른 헬리콥터에는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와중에는 나중에 온 경찰들이 헬리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저격수와 도망쳐 온 헬리콥터 조종사를 오인사격해서 중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가 인질 사망 이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 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을 가지고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IOC와 독일 정부는 대회 재개를 결정하였다.

나치즘의 선전장이 되어버린 베를린 올림픽의 기억을 딛고 독일 부흥을 상징하는 가장 화려한 대회를 만들겠다는 서독 측의 결심은 검은 9월단 사건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올림픽에서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 대회였다.

한편 테러범 8명 중 5명은 총격전 중에 사살되었고, 남은 3명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의보도에 따르면 뮌헨 올림픽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스트들은 네오 나치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묘사되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네오 나치 간의 커넥션이 형성되는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뮌헨 올림픽이 개최된 시기는 68운동의 대두와 데탕트 기류의 시작으로 냉전이 다소 완화되었을 때였으며, 오늘날처럼 고도의 장비와 전문 인력을 갖춘 테러리즘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한 마디로 당시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에 큰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올림픽으로 인한 혼란, 정보 부족 및 수집 장애도 큰 원인이었다.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테러범들과 교섭을 하러 테러범들의 거처를 방문한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했다. 진압작전 때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 라며 당황했고 진압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이 독일이니 독일이 맡아야 할지, 인질이 이스라엘인이니 이스라엘이 맡아야 할지, 테러범이 팔레스타인 계열이니 팔레스타인의 협조를 얻어야 할지 등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