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예식장 (신신예식장)을 평생 지원해주신 백낙삼 선생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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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예식장 (신신예식장)을 평생 지원해주신 백낙삼 선생님 별세


2023. 5. 17.



백낙삼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두동면 삼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가족은 한 방에 부모님을 포함해 13명이 지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두동국민학교 재학 중이던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그해 10월 백낙삼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살다간 희망이 없다며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 가야동에 조그마한 집을 구했다.

다음해 1월 집에서 3km 떨어진 성지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백낙삼이 아버지의 뻥튀기 장사를 도와서, 친구들은 그를 "박상쟁이"라고 불렀다.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생중학교를 거쳐 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4년제 초급대학인 동아초급대학에 입학했다. 6.25 전쟁 동안 군복무를 하였다. 군복무를 마친후 중앙대로 진학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졸업을 단 1년 남겨두고 대학을 중퇴하게 되면서 교사의 꿈을 포기했다. 이러한 그에게 결혼은 그림의 떡이었다. 주변의 성화에 맞선을 나간 그는 지금의 아내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뒤 결혼식을 미루고 1년 넘게 돈을 벌러 경상남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20대 때부터 사진사로 일하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번 그는 1967년 경남 마산시(現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 3층 건물을 사서 신신예식장을 열었다. 자신들처럼 결혼식을 제때 올리지 못하는 신혼부부를 돕고자 사진촬영비만 받고 무료로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그러가다, 2019년 국민훈장을 수훈받은 후에는 사진비마저도 받지 않으며 무료로 예식을 치러줬다.

1만 4천여쌍의 결혼을 올리며 1만번 이상은 백 대표가 주례를 섰다고 한다. 또한, 1988년 국민포장 수훈 후 받은 상금 50만원과 사비를 털어 신신장학회을 조직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하였으나, 재정 문제로 1992년 해체하였다.

2015년, 중앙대학교에서 백낙삼의 사회 공헌을 인정해 62년만에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던 2022년 4월 옥상에 심어둔 채소를 보러 가던 도중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의식을 되찾긴 했으나 팔, 다리가 마비되어 일어날 수가 없어서 재활치료랑 같이 투병치료를 하였으나 결국 2023년 4월 28일에 향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